필름바구니

바람의 노래 II

 

“그래요, 우리는 바람과 싸우지 않았어요. 바람과 함께했던 거지요”

 

[촬영기간]

2023년 6월 8일 ~ 9월 19일 (상모리 대낭굴불턱 ~ 표선면 민속해안로 수수새  촬영까지) 

노래와 춤의 공간을 찾아서

제주의 옛 바람의 유물들에 대한 촬영을 마치고, 이제 우리의 바람 이야기를 촬영할 때가 되었다. 바람과 싸워왔던 이야기들. 

백약이 오름의 정상이 아닌 아래 둘레에는 시원한 벌판이 있는데, May It Be를 촬영할 때 발견했던 곳이다.  푸른 초목과 붉은 노을과 구름을 카메라 의  360도 범위에서 내내 얻을 수 있는데 특히, 인공물이 노출되지 않아서 더욱 좋아한다.

May It Be 작업할 때 예진이의 춤에 대한 짐벌 촬영물을 보고서 우리 모두 감탄했던 아름다운 배경. 그 누가 춤을 추더라도 천상에 도달한 여신과 남신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초월적인 공간이한다…라고 말은 하지만 예진이가 춤을 추고 내가 촬영을 할 때에만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은 곳.

첫번째 고려대상, 성읍들판

그런데 사실 처음에 예진이가 선호했던 곳은 성읍 마을 뒷편의 들판이었다(우리는 성읍들판이라고 부른다). 이 장소의 장점은 ‘도로 옆’이고, ‘초목들이 거칠지 않다’인데 단점은 ‘촬영하기 좋은 짐벌 앵글이 200도 정도’라는 점. 하지만 춤에 대해 가능한 짐벌 기법 중 내가 선호하는 것이  ‘오르빗(Orbit, 주변회전)’인데 이 장소는 돌다보면 잡다한 피사체들이 포착되어(위에서 두번째 영상), 결국 촬영물에서 못쓰는 부분이 많이 생긴다.  게다가 가끔 주인이 와서 잔소리를…하는데 지금은 서로 안면이 생겨서 그나마 다행히긴 하다.

아, 제주도의 아름답고 평평한 들판들은 대부분 마소 먹이를 위한 목초지라서 주인/임대사용자가 있다. 20번 촬영을 하면 약 1번 정도 주인을 만나곤 하는데 대개는 그분들, 별 신경을 안쓰는 편.

목초가시로 인한 상처 (Playing Love 촬영 중)

두번째 고려대상이 바로 이곳 백약이 오름이었다. 장점은 ‘다소 높은 언덕이라서 바람이 잘 불고, 시야가 탁 틔였다’이고, 단점은 ‘바닥에 큰 돌과 가시목초가 많아서 다칠 위험이 있다’.

이미 단점으로 인한 고생을 경험 했다. Mayy It Be와 Play Love를 촬영할 때는 목장 일꾼들이 다니는 몰래길 몰라서, 백약이 주차장에 차를 댄 후 무거운 장비들을 베낭에 메고 200m 정도를 올라가느라 고생을 했다. 그리고 예진이의 정갱이에 가시 상처를 겪었었고. 

그러나 진정한  제주도민이라면 이런 문제를 또 겪을 수는 없는 법. 우리는 결국 몰래길을 찾아냈고, 각반을 이용하여 목초가시 정도는 간단히 방어. 

2023년 8월 9일_백약이 사전답사

결국 그것을 대면하다. 바람.

많이 방문했던 곳이지만 올해는 태풍과 비가 잦았기 때문에 그곳의 근황을 미리 방문해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본 촬영시 더위와 습기, 무거운 장비를 감당하는 수고가 제대로 성사될 수 있기 때문. 그리고 사전답사는 본 촬영과 결과물을 상상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예술인으로서 상당히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라는 점.

한번 상상해보라, 자신이 평소에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이 결국 하나의 작품으로 변모되는 삶을. 누구에게는 잠시 구경하거나 쇼핑을하고 잡담을 나누며 ‘너와 나’만을 위한 배경으로 머물러버리는 그 시공간이 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형상으로 재탄생되어 또 다른 세상에 속하게 된다는 것. 나는 전자가 바로 인본주의적 삶이고, 후자가 이상주의적 삶이라 구분한다. 둘 중에 어느게 더 좋으냐고? 아서라, 이제 그런거 왈가불가하기엔 좀 지루하다.

2023년 8월 10일_노래와 춤

백약이 오름에서의 두번째 날, 노래와 춤 가운데 무엇을 먼저 촬영하는가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노래를 먼저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땀을 흘리지 않고 체력을 아낄 수 있고, 예진이가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서 카메라를 운용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기 때문. 특히 오늘 준비한 드레스는 바람에 나부끼는 가벼운 롱 드레스이니 목초가시에 여지없이 망가질 것이다.

항상 노래와 춤을 촬영을 하기 전에는 ‘오늘은 어떤 결과가 나올까?’하는 설레임이 있는데, 장비들의 좋아져서 대체로 생각보다 더 잘 나오는 경우가 많다.

오늘 준비한 카메라는 캐논 R5C. 무겁고 AF가 썩 좋질 않지만 12비트 Raw 내장(외부 녹화기 없이) 촬영이 된다하여 플리시보 신념으로 믿고 쓰는 카메라다.  특히 짐벌로 춤을 촬영할 때 AF는 잘 잡아줄지 살짝 걱정은 하지만 일단 예진이를 중앙에 잘 두고 찍을 것이고, 간혹 목초가 프레임 중앙에 들어올 때 촛점이 나갈텐데 그건 그냥 감성적으로 느껴지도록 편집하려고 마음 먹었다. 이전에 이 녀석보다 AF가 더 나빴던 후지 X-T4로도 May It Be 춤을 그럭저럭 촬영을 잘 했기에.

그런데 실제 짐벌 촬영을 하면서 나를 힘들게 했던 점은 AF보다는 카메라와 짐벌의 무게였다… 후지 카메라 사용할 때는 분명 훨훨 날라다녔었는데, 이번 촬영 때는 ‘더 무거운 카메라 + 더 무거운 짐벌 + 모노포드’이였기에 왜그리도 내 움직임이 느리고 힘들던지…

카메라가 무거워지면 짐벌도 좀더 무거운걸 사용해야 하는데 이때 사용한 짐벌이  무겁기로 유명한 ‘지윤 크레인 2S (1.8kg)’

2023년 8월 10일 오후 7시 37분, 9월에도 보충 촬영을 했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그 날이 마지막 촬영이었다.

우리 삶에 딱 한번 뿐이었던 그 시간과 그 하늘, 그 노력…

물론 지난 날, 육지에서의 청년 시절에도 나는 늘 열정적이었지만 지금과 그때의 큰 차이점이라면 지난 기간을 다시금 바라보고 들을 수 있는 영상이 남아 있다는 것. 글이나 그림, 그 어떤 기억보다도 가장 잘 보이고 가장 생생하게 내 삶과 노력을 기록해 주며, 타인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내 개인의 삶은 타인과의 직접적인 만남 없이 항상 고독하지만 사실 인생은 홀로 태어나 결국엔 홀로 떠나고, 이승에서는 감쪽같이 잊어지는게 매우 확실한 진리가 아니던가. 그 엄중한 진리가 나의 여정을 항상 채찍질 한다.

하늘이여, 그대의 시선과 마음 속에도 우리의 소중한 노래와 열정적이었던 춤을 기억해주기를 비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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